“어느 수감자의 글 : 윤리적 소비” 2011년 윤리적 소비 공모전에 응모된 많은 연구자들의 글들 가운데 손 글씨로 적힌 편지 한통과 미력한 글이나마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성했다는 원고가 있었습니다. 작성자는 당시 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수감자라고 본인을 소개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수인의 신분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 같은 놈에게 무슨 기회가 있겠습니까마는 며칠 전 한겨레신문을 보던 중 2011 윤리적 소비 공모전이란 광고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저 참여라는 도전에 의의를 두고 소비와 관련된 평소의 생각들을 지면에 옮겨 보았습니다.” 2011년 윤리적 소비 공모전 자유분야로 응모한 수감자의 원고는 원고지 11쪽 분량의 글이었습니다. 다른 원고들에 비해 체계적이거나 전문적이지는 않았지만 교도소 담장을 넘어 전달된 윤리적 소비 원고였습니다. “공모주제의 요지들에 걸맞은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원고를 작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저의 바람은 미력한 글이나마 읽어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수감자의 원고가 도착하고 약 10년이 지난 지금, 윤리적 소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소개하여 “윤리적 소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환기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윤리적 소비 우선, 윤리(倫理)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즉 인간관계의 도리이다. 윤리는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림의 기준과 선악의 기준을 정립하고 행동지침과 삶의 지향점을 제시한다. 결국 윤리란 상이한 욕구와 상이한 삶의 방식을 갖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기보존과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전적 관계맺음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윤리는 인간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조정하는 지침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인류는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인류는 지난 100년 동안 환경파괴라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질러 왔다. 환경파괴란 단순하게 자연생태계가 파괴되어 재앙으로 되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인류는 왜 자신들의 삶터를 불사 지르는 것과도 같은 환경파괴를 자행하였는가? 인간은 먹음으로써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먹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그 모든 일과 의미를 우리는 생명활동이고 삶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연장과 더불어 윤택한 삶을 위해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은 어떤 방식이 되었든 간에 그 무엇에의 생명이고, 우리는 우리의 생명(등)을 위해 그 무엇에의 생명과 정력을 대신 사용(소비)한다. 그렇듯 우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삶을 어떤 식으로든 중단 또는 단축시키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대지·공기·물·동물·식물 등 그 밖의 모든 천지자연은 다 우리의 소비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극대화를 노린 농약살포로 인한 토양오염, 방만한 산업화로 인한 대기오염, 폐수·세제·합성오수 등에 의한 수질오염 등은 화학첨가물의 필수불가분과 더불어 인간의 먹을거리의 오염을 초래했다. 결국 이렇듯 총체적으로는 지구와 인류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불필요한 소비재들이 경제성과 상술로 인하여 필수로 둔갑하고, 그로 인해 지구상의 크나큰 독이 되었다. 최근의 구제역·조류독감 사태를 보자. 생명을 가벼이 다룬 인간의 소비탐욕에 대한 재앙이 되레 인간의 생명에 역습할 수도 있었다. 구제역으로부터 원전사고에 이르기까지는 그 개연성과 모종의 공통점이 느껴진다. 당시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부터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지진과 해일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다. 인류 스스로가 주체하지 못했던 소비욕구에 의해 발생된 인재(방사능 유출을 비롯한)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분수에 지나친 식탐으로써 폭식을 하고선 그로 인해 불어난 살들을 보며 후회를 하고, 이를 다이어트 약과 운동용 자전거를 사는 것으로 대처하는 이 시대의 어리석은 세태 아니겠는가. 이런 병폐와 폐해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은 자연과 생명을 인류와의 일체로 느끼는 감수성과 환경파괴에 대한 고통과 경각심을 공감하는 것이 인류의 모든 실천에 앞서야 한다. 물론 당장 일시적으로는 더러 손해가 있더라도 천지자연과 만물생명의 본래 가치 자체를 보존하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을 둘로 구분하고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 있다고 보는 근대적 사유구조로는 자원고갈, 환경오염 등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며 곧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 것이다. 또 도구적 이성과 이기심에 의해 발전을 추구해왔던 근대사회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인간의 물신화로 귀결되고 있다. 인간 또는 자연, 이성 또는 감성, 문명 또는 야만 등의 이 같은 극단적 이분법은 이제 그 모든 것들을 합일, 즉 인간과 자연의 일체, 인간과 인간의 화합,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모색하는 윤리적 공동체주의로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으로 외형적 화려함과 편리, 그리고 신속함만을 추구하는 욕망의 소비구조 굴레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지향 삼아 이를 추구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적정하지 않은 생활방식부터 먼저 타파하고, 극단적인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부터 발현된다. 이처럼 인류는 자연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감을 통하여 생명의 감사함과 경이로움을 보고 느껴야 한다. 지나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충분한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적절하고 적당한 소비를 하는, 윤리적 소비라는 절제의 삶이, 바로 이 인류와 지구전체를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이다. 여담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나 수장들이 자기네들 아쉬울 때마다 카메라를 앞두고 한두 번 벌이고 마는 퍼포먼스가 진정한 변혁을 이뤄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 용기와 각오, 그리고 헌신과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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